때 : 2009년 11월 7일 토 하반기 피정 중 10:00-12:00
곳 :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강사 : 허귀희 글라라 수녀님 (신학박사) /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전교 수녀회
특강 Memo :
"작은 나무" 아씨시의 성녀 글라라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가 유명한 이유는 -'오상' , 평등, 작은 형제, 순례
성 프란치스코 1226년 선종. 1224년(선종 2년전) 오상을 받으심. 사후 바로 시성준비 2년후 1228년 시성.
성녀 글라라 1253년 선종. 시성 1255년 (시성준비기간 2년후 바로 시성되심)
유럽에서 계속 유지되어오는 수도원은 지금도 봉쇄수도원 입니다.
St. Clare of Assisi
한국에서 불과 20년전만 해도 여성 수도자들이 성경을 읽고 공부 한다는 것이 가슴 뛰는 시대였습니다.
지금 시대에도 가톨릭안에서 여성은 차별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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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년전 중세시대에 글라라 성녀가 사후 바로(최소 시성준비기간이 2년임) 시성이 된것은 남성우월(절대) 시대에서도 파격적인 일입니다. 왜?
당시대에 글라라 성녀가 수도생활을 하시는 중에 교황님이 5대의 계승이 있었다.
지상의 교황(대리자)들이 성녀 글라라에게 기도를 부탁드렸습니다.
glare 빛 Clare, Chiara
허귀희 글라라 수녀님 (신학박사) /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전교수녀회
강사가 놀랜 부분 : 시복시성문에 광휘, 모든 것안에서 빛, 수도생활에 광휘, 살아있을 때 빛, 천상에서도 빛,..
(시성교서 3장, 3절에 27여차례로 빛 이라는 교서에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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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서와 영성의 관계성 빛의 영성 (The Spirituality of Light) (창세 1,3 ; 시편 4,7 ; 56,14 ; 이사 9,1 ; 요한 1,4-5) -질서의 시작
창세기 1,3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
시편 4,7 많은 이가 말합니다. “누가 우리에게 좋은 일을 보여 주랴?” 주님, 저희 위에 당 신 얼굴의 빛을 비추소서.
시편 56,14 당신께서 제 목숨을 죽음에서 건지시어 제 발이 넘어지지 않게 해 주셨으니 하 느님 앞에서, 생명의 빛 속에서 걸어가도록 하심입니다.
이사야9,1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
요한 1,4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1,5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1,9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
<성경과 영성>2학기 들어가기 에서 발췌
우연히 아닌 것이 미국에서 공부시절 Teaching Assitant - 5대 종교 영성 과목-(조교 : 영화,강의,토론 참여) 로 공부할 때 였습니다. 성녀는 출생부터 성장과정, 수도원생활 내내 칭찬, 과찬의 대상이었습니다.
"아무리 성녀이지만 참 그렇다" 하고 책을 덮었습니다. 차을 몰고 가면서 "예수님 너무 편애가 지나치지 않습니까? "라고 예수님께 대화하면서 캠퍼스로 갔습니다.
강의가 막 시작되었고 영화 한편이 보여지고 있는데-마니피캇 배경음악- 나자렛 시골 장면-왜 목숨까지
바쳐가며 신앙을 지녀오는가?-십자가의 예수님 장면이 펼쳐졌습니다.
저는(허귀희 글라라 수녀) 한순간! 아!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고통을 받고 계시며, 신음하시며, 아파하시는 것을 현존으로 느꼈습니다. 지켜 보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저는 가슴이 찢어지고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 앞에 다시 완전 항복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 체험을 많이 해왔지만...
그순간 글라라 성녀께서는 수천번 가슴이 찢어지고 견딜 수 없었을 것이라는 느낌,체험이 전해져 왔습니다. 그런 체험중에 프란체스코 논문 통과가 제일 어려운 대학에서 논문심사를 불과 2주만에 통과하면서 체험을 하게 되었었습니다.
체험후 글라라 성녀께서는 예정된 분이라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알수록 가슴이 뜨거워 질 것입니다.
출신배경:
당시 유럽에서는 귀족,기사는 상위계급이고, 성 프란체스코 집안은 상인으로서 중간계급, 하위계급으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글라라 성녀는 기사가 7명이 사는 양가 귀족집안이며, 미모가 예뻤다고 기록되어 있고, 역사안에서 최초로 라틴어로 회헌을 작성한 여성으로 교양있는 분이었습니다. 1200년 시대적 상황에서 예루살렘까지 순례가신 어머니는 믿음이 대단히 깊으신 분이었습니다. 성녀의 어머니까지 칭찬한 최초의 시복 교서입니다.
성녀 클라라(Chiara di Favarone : 글라라는 "빛나는 이"라는 뜻)는 1193년(1194년?) 이태리 아씨시의 상류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귀족이며 부자인 아버지 파바로네(Favarone)와 고귀한 신분과 재산과 애덕과 자비심을 겸비한 어머니 오르똘라나Ortolana)사이의 맏딸(4녀 1남 중)인 성녀는, 그녀 어머니가 해산이 가까울 무렵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께 순산을 청하는 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 "두려워마라. 여인아, 너는 안전하게 빛을 낳으리니, 그 빛은 빛 자체보다도 더 밝게 빛을 비출 것이니라."라는 음성을 듣고 예언된 밝은 빛이 거룩한 뜻에 따라 성취되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마음에 의해 "글라라"라는 이름을 갖게된다.
글라라는 아주 정직하고 착한 생활을 하였으며, 불우한 사람들을 돕는 일을 좋아하며 실천한 바(시성 조사 제1증언), 어릴 적부터 거의 천사와도 같은 삶이었으니, 동정이었고 늘 동정녀로 머물렀기 때문이며 성녀는 거룩한 선업들에 늘 열심이어서, 그녀에 대한 좋은 명성이 그녀를 아는 모든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다 (시성 제12증언).
예쁘고 과년해진 글라라는 성녀의 생애 시초부터 그녀가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성화된 것인 양, 거룩한 행동들을 주의깊게 지켜보던 많은 친척인 신랑감들로 부터 청혼을 받을 때 전혀 들은 바 아니하고, 오히려 청혼한 이에게 세상을 경멸하도록 설교를 하였으며(시성조사 제18증언), 단식과 기도에 열중하고 항상 하느님에 관한 것에 대해 이야기 하기를 원했다.
"작은 나무"
제가(허 수녀) 연구한 바 프란체스코 성인의 뒤를 따를 평가가 아닌것이, 시성조사 증언록에 필립바 수녀 증언를 통해 성녀 글라라의 어머니 오르톨라나Ortolana 피우미가 해산하기 전에 성 루피아노 성당 에서 다음의 목소리를 들었다
" "두려워마라. 여인아, 너는 안전하게 빛을 낳으리니, 그 빛은 빛 자체보다도 더 밝게 빛을 비출 것이니라."
그녀는 깊은 감동을 받고 그 딸의 이름을 글라라(빛나는, 영롱,광휘...)라고 지었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들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성서의 인물중 '성모님'처럼
이야기를 바꿔 만약 여러분이 임신중에 이런 계시를 받았다면 어떠하겠는가?
10달 동안 어머니의 자궁에 새생명이 있습니다.
각자가 이 시간에 여기 강의를 듣고 있는 것도 개인의 역사를 만들고 있습니다.
두 개체이지만 태어나면 각자의 인생이 됩니다.
수도자는 자신을 깊이, 심각하게 들여 보아야 합니다. 상처 치유, 성찰 해야 깊이 들어다 본 만큼 기도가 깊어 집니다.
인간은 수정후 바로후 기억이 되기 시작합니다. 기억체 입니다. 기억에 지니고 있지만 뛰엄뛰엄 기억이 됩니다. 21세기까지 심리학, 뇌과학의 발달로 그것이 증명되고 있습니다.
우리 옛 속담에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 1/3은 엄마 뱃 속에서
예) 엄마가 도둑에 놀랬다면 태아에게도 놀랜 기억이 남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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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어머니가 기도하다 들은 *죽음ㆍ어둠을 열고 빛이 될 것*이라는 소리를 듣고, 프란체스코 성인의 애인이라는 누명도 쓰고, 동생 베아트리체도 이미 어려서 성덕이 자자 했습니다. 이런 성장배경을 보아도 단순히 프란체스코 성인의 설교를 듣고 성덕의 길로 간 것이 결코 아닌 것 같습니다. 이미 어머니 자체가 성덕이 있으시고 어려서 부터 이웃으로 부터 거룩한 평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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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주일 18세에 집에서 뛰쳐 나갑니다. 가문(기사)에 이런 일이 없다.고 가족이 만류하였습니다.
1211년에는 작은 무리의 프란체스코는 드러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확실한 게 없는 상태에서 수도생활로 뛰어 나왔습니다.
대 귀족가문으로써 예수님을 따르고 싶었던 것입니다.
여성으로서 자주권이 없던 그 당시의 배경과 환경에서는 대단한 성덕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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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차별(성 차별)일 수 있습니다. 800년간 글라라 성녀는 '작은 나무'라 하는 것은 옳치 않습니다.
글라라 성녀는 활동하시던 60년을 이미 그 자체로 성녀이셨습니다.
'작은 나무'라고 자신의 '겸손'을 작게 부르신 것입니다.
20~30대를 받았지만 30대~40대 순수한 것이 급격한 변화를 겪는 여성의 몸입니다. 호르몬도 변합니다.
영성도 영향을 받습니다.
여성 신비가 예수의 데레사, 에카르트, 노이츠의 줄리안, 빙데를 힐가르트 분들은 자서전을 통하여 하느님 체험을 책으로 남겨 놓으셨습니다.
성녀 글라라는 산 세월과 예수님 체험이 많으셨는데 그런 것들이 성녀의 편지에 남아 있습니다.
The First Francisan Woman 마가렛 박사의 연구에는 동등한 성덕, '평등'회칙의 법제화를 평가하고 있습니다.
당대에 평등이라는 탁월한 혜안은 지금도 수도회 내 어려움을 간파하신 것으로 평가됩니다.
편지는 일상적 소식을 씁니다. 잘 있느냐? 등등 안부 이지만
성녀의 편지를 읽어 보면 7궁방에 들어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비주의 관상.
브라이스 아녜스 공주는 보헤미아 국가의 딸입니다. 당시 유럽에서는 공주는 정략적 대상물이었습니다.
로마의 프레드릭 왕은 아들의 왕세자비로 보헤미아 공주 아녜스를 간택한다는 약혼 소문이 돌았으나 국력의 힘이 보다 나은 오스트리아 왕조의 마가렛으로 약혼을 돌렸습니다.보헤미아 보다 아녜스의 결혼배경에 대한 것이 유럽역사에 기록된 중요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영국에서 다시 청혼이 왔으나 아녜스 공주 부친의 사망후이기에 오빠는 더욱 신중하였습니다.
로마 프레드릭 대왕의 아들의 비로 간택한 오스트리아 마가렛 공주와 파혼 후, 프레드릭 대왕의 처가 죽자 또다시 자신의 비로 청혼을 합니다. 그러나 아들이 마가렛과 파혼 후에 보헤미아의 아녜스와 결혼하고 싶어했습니다.
이런 와중에 사촌 엘리사벳이 프란체스칸들을 만나고 병원을 세우고, 수도원 세우고 하는 것에 관한 소식들을 듣고 사촌 엘리사벳의 신심행위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아녜스는 이런 찌지리한 남성들과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보헤미아 첫 수녀원에 입회하게 됩니다.
5대에 걸친 당시 교황 다섯 분들이 글라라 성녀에게 교회적 신학적 신비적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유럽의 역사속에서 글라라 성녀께서는 각 수도회에 첫 편지를 보내기 시작한 단계였습니다.
"십자가의 예수 / 영광의 왕"
응시 gaze
숙고 consider
관상 contemplate
모방 imitate
웃으게 이야기 하나 : 어느 자매가 남편이 평생 못 살게 구는 것을 하느님께 하소연 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자매의 끈질긴 이야기를 듣고 천사를 보내어 그럼 3가지 소원을
들어 줄테니 잘 사용하라고 하셨습니다. 천사가 말하기 꼭 명심할 것이
있는데요. 그대신 부탁한 소원의 10배로 남편에게 돌아갑니다.하였다.
1)예뼈지게 해주세요 그랫더니 남편도 10배로 더 잘생기더니 더 바람을 피웠다.
2)부자 되게 해 주세요 그랬더니 잘생긴 남편이 돈이 10배로 느니 더 바람을 피웠다.
천사가 경고 하였다. 이제 마지막 하나 남았으니 잘 쓰세요.
3)죽지 않을 만큼 심장발작을 저에게 주소서. 남편은 10배로 심장발작을 일으켰다.
거울 영성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라
거울이 예수님이라 하신 분은 글라라 성녀가 최초입니다.
관상
하느님께 무엇을 얻는 것이 큽니까?
오해 하지 마십시요. 개신교도 구원을 저희와 같이 받습니다.
큰 차이는 하느님을 눈앞에 모시고 지복직관至福直觀(visio beatifica)을 누리는 것이 가장 큰 것을 얻는 것입니다.
면전에서 마주 보듯이,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1고린토 13장12)
완전한 기쁨 자체를 영원히 누리는 것은 이 세상에서 '사랑'에 빠지는 것입니다.
뇌과학에서는 남녀간 사랑이란 호르몬의 영향으로 3년 or 석달를 말하고 있습니다.
falling in love (사랑에 빠진 다는 것에 falling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 것은 좋은 것은 아닙니다.)
'기氣'가 끌어 다니기에 눈꺼풀이 씨여 떨어지는 것입니다. 여우짓 하면서 그 사람 앞에서 본질이 달라집니다.
관상이란
글라라 성녀의 3편지에
영혼을 영광의 광채 앞에 넣어 두어라 (정신: 의식의 상태, 영혼 soul, 마음 mind)
내 마음을 신적 형상 앞에 두어라!
전 존재를
기도로 예수님 앞에 서면
1) [생각]이 강 river - 과학자 뇌 스캔.
지금은 뇌과학이 발달하여 영성강의에 앞서 현대적 뇌과학에 대하여 1시간 기초 강의를 해야 합니다.
옛말에 오만가지 생각을 한다는 말이 뇌과학에서 입증되었습니다. 5만~6만가지 생각이 뇌에서 흐릅니다.
전존재(entire being) 내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판단과 생각이 다 '꽝'입니다.
나를 알지 못하면서 5만~6만가지 생각이 떠다니는 것입니다.
기도하려고 앉아 있으면 갑자기 피자가 생각나고 . . .누구와 먹고 ...그러다 무슨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러다 싸웠던 분노가 떠올랐다가...그러다 그 같이 먹던 누구는 잘 있나?..그와 칼국수를 먹었지...내 몸은 여기 있는데... 어디요?... 성당에..... 생각은 시공간을 초월하고 있습니다. 몇년,몇십년 과거로 ...
제가 성지순례를 맡게 되어 파리에 들렀습니다. 에펠탑이 여행코스에 잡혀 있었습니다. 성지聖地와는 무관하게 순례객의 관광을 위해 들어있는 코스였습니다. 순례객에 대한 안전,보호 책임의식 때문에 에펠탑이 마음에 들어 오지 않았습니다. - 일행의 강추에 의해 에펠탑을 에레베타를 타고 오르니 - 에펠탑이 위대하게 느껴졌습니다. 머리 두개골 크기는 거의 같은데 어떻게 그 시대에 철근을 이렇게 쌓아 올린 과학자가 있다니 인간의 위대함을 느겼습니다.
50,60대는 30년전 그 감정을 가지고 아직도 삽니다.
예)를 들어 어려서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가진 채, 모든 사람에게 그 숨겨진 분노를 나눠주고 있습니다.
생각만 하면 과거로 돌아가서 그 분노를 키워서 삽니다.
지금 여기 Now Here
저도 (허수녀) 현재를 산지가 얼마 되지 않습니다. 내 인생을 네가 주고 있습니다. 수강 시간에도
한 순간이라도 나를 온전히 사랑하고 이웃을 온전히 사랑했는가?
Yesterday is History,
한 시간 뒤는 아무도 모릅니다.
Tommorow is Mistery
바로 지금 여기
Today is present, gift
현재는 은총이며 선물입니다.
2) 생각을 지켜 보기
내가 지금 걱정하고 있구나. 바람피고 있을까? 잡기만 해봐라...너 만나 내 인생 이꼴 됐지?
네 생각,의식이 붙잡힌데로 끌려 간다.
끊어야 한다.
3) 내 안에 내가 있다
진정한 나, 말하는 생각, 생각 덩어리가 아니다. 의식이 시끄럽다.
영혼의 소리는 매우 작습니다.
대부분 신자들이 변화가 없습니다. 염경기도, 판단하고, 우월 의식만 키우고 있습니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으면 싫어합니다. 잘난척 해야 합니다....
영혼을 만나면 고요해 집니다.
바로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어느 자매님들 ...저 관상했어요. 수녀님
관상안에서 transform(변화된 삶)이 드러나지 않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드러낼 필요도 없고
고요하게 드러납니다.
남이 알아 줄 필요도 없고 이미 그 상태입니다.
고대의 모든 가르침은
"나는 늘 나를 만나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오늘 강의하는 수녀님 괜찮은 데'- 그 생각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여기 있는 분들 대단하시다 - 나는 늘 나 안에 있는 것입니다.
아니다 하는 것은 나의 부정적인 '투사'입니다. 내 안에 그 부분이 없기 때문에 입니다.
관계안에 단점, 문제가 보이면 그것은 내가 반응하는 것이 [정화]되어야 할 부분이다.
나의 한 부분을 만나기에 성인을 보면 좋은 기분이 되는 것입니다.
정신,영혼,마음이 전존재가 관상안에서 하느님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것이 관상입니다.
편지안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성녀 글라라의 거울앞에 그녀가 아니라 예수님이 나타나신 것은 곧 일치 입니다.
응시 gaze는 깊이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to see, to look 이 아니라
눈빛만 보아도 느끼는 것 41년을 산 다미아노 십자가를 관상 응시하였습니다.
글라라 수녀원에 교황 비오 1958년에 전시하였습니다.
영광의 왕 glory 그리스도 영성의 정점입니다. - 성녀의 탈혼 상태에서
깊이 응시 - 멘탈 숙고 - 관상
강생 공생활 십자가
인간은 하느님과 본질이 다르다. 모상입니다.
하느님이 본질을 바꾼 것이 강생입니다.
하느님 - 성모님 - 인간
하느님이 성모님을 통하여 강생하신 겸손, 가난을 기가 막힌 가난이라고 성녀는 말씀하셨습니다.
존재 자체가 변화되는 가난은 물질, 비움, 나눔의 차원을 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본질을 바꾼 것입니다. 본질을 바꾼 것이 [사랑]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 강아지 좋아하시죠?. 이뻐하고, 생각나죠?. 그러나 여러분이
강아지가 되고 싶지는 않죠?
십자가는 하느님의 아들을 거부해야 예수는 살 수 있습니다.
내가 나를 모르는 데 남이 모르는 것은 당연합니다.
"예수님이 영광의 왕 (영광의 광채)를 만났다" 편지 안에서 광채라고 쓰여 있습니다.
저는 (허 수녀님) 네 인생에 이것만 없었으면 한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사람들을 만나 대화하기를 좋아 합니다. 열정적입니다.
길게 내적 작업을 하는 어느 날... 환시를 보았습니다. 만다라가 펼쳐지면서 그 부분만 없어졌으면 하는..... 그 부분이 아름답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이것만 없었으면 하는 ...나의 십자가를 찾으려 해야 ...보이는 부분이... 아름답게 그려져 있었습니다)
100% 그 것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가 없었고 ...하느님을 내 안에 온전히 만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내가 가장 아픈 것이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위대한 신성이여! 영혼의 광채 앞에
4편지를 남기셨습니다. 1편지 9절
2편지 20절 시편 44
3편지 16절에 예수님의 용모가 쓰여 있습니다. 해와 달이 찬탄하고 있다.
천사들이 찬탄하고 있다
4편지 아가서 나를 포도주 방으로 데려가서 팔 베게 안아 주시고 나의 입술을
입맞춰 줄 때까지 달려가라. 자매여. 그때 나를 기억해 주어요. 아녜스
중세에는 아가서를 지금의 포르노 취급하듯이 하였습니다. 신적체험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한용운 시에서
정제된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교황이 들여다 보는 교회 성안에서 들여다 보는 글라라 성녀가 아녜스 공주에게 야할 정도의 편지를 썼다는 것은 [신적 체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관상에 몰입된 그림이 있습니다. 약간 얼이 빠진 듯한 예수의 데레사 그림이 보여 주고 있습니다.
관상 체험 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1560년 환시(부활하신 주님), 천사가 불화살로 심장을 꿰뚫다. (자서전 29장)
나의 여정 (나의 존재)는 비천하기도 하지만 위대한 능력을 주신 존재입니다.
분노 속에 10년, 30년을 생각 속에 갇혀 살 수도 있지만, 지복직관(해설 클릭)을
이 세상에서 창조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살 수 있는 위대한 존재입니다.
프란체스칸으로 불렸다는 것은 관상을 보여 주시기 위해 초대 받은 것_입니다.
성녀 글라라에게 전구를 청하십시요!
새로운 여성의 영성을 충분히 닮아서 살기 바랍니다. 평화를 빕니다. 샬롬!
- 허귀희 글라라 수녀님 (신학박사) 강의 중에서 <메모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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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귀희 글라라 수녀의 성경과 영성 ☜ click URL 연결 예수회 센터 게시판 강사: 허귀희(글라라) 수녀. 성경신학박사, (아씨시 전교 프란치스코 수녀회) 2년 과정 학기별 12주 학기당 12만원 / 매주 월 오전 10:00-12:00 /봄학기 3월 첫째주 월요일, 가을 학기 첫째주 월요일 / 예수회 센터 |
성경과 영성 (강좌 소개글)
영성적 주석은 강의에서 다룸
영성신학이란?
성경과 영성’은 하느님과 성경의 인물들이 가진 관계를 ‘현재 영성’의 관점에서 새롭게 조명하고,
'나는 누구인가’라는 각 개인의 진정한 정체성을 찾아나가게 돕는다.
곧, 내 삶의 ‘지금 바로 여기’에 살아계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현재 영성’을 살아가게 이끈다.
글라라 성녀의 죽음
이제 죽음에 임박한 글라라는 교황 칙서를 가슴에 꼭 품고 생각에 잠긴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며
황홀경에 빠져 있었다.
자기를 둘러싸고 있던 자매들에게 그녀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나에게 그 분이 보이는 것처럼 자매들도 저 영광의 임금님이 보이십니까?"
감동을 받은 가난한 자매들은 복받쳐 오르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글라라를 바라보았다.
흐느낌이 지나간 후 짧은 침묵의 순간을 깨드리며 글라라는 말했다.
"나를 창조하시고 구원해주시고 또 이제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은 찬미 받으소서."
그를 부축하고 있던 자매가 물었다.
"어머니, 무엇이 보이세요? 아마 주님이시겠지요?"
글라라가 자매에게 대답했다.
"맞아요! 나는 그분이 보여요."
그리고 나서 글라라는 머리를 숙인 채 가냘픈 숨을 몰아쉬었다.
그 날은 1253년 8월 11 석양이 지는 때였다.
아씨시의 성녀 글라라 / 제주 글라라 수도원 / 프란치스코 출판사
이미지 사진
Herbert Schneider, OFM
장 마리아 안젤라 수녀
(익산 성 글라라 수도원)
1. 성녀 글라라의 회칙에 드러난 삼위일체
성녀 글라라는 회칙 6장에서 성 프란치스코가 산 다미아노의 가난한 자매들에게 준 생활 양식(forma vitae)을 다음과 같이 알려주고 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영감으로 거룩한 복음의 완덕을 따르는 삶을 선택하셨기에, 지극히 높으신 임금님,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딸과 여종이 되시고 성령의 짝이 되셨습니다"(참조: 회칙 6,3).
이를 체계적으로 분류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자매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딸,
아드님의 누이,
성령의 짝이 되었다.
아울러 성녀는 이 세 가지 삶의 자세에서 거룩한 삼위일체를 나타내 보여준다. 성 프란치스코는 가난한 자매들의 삶이 자매들 서로를 신비롭게 엮어주는 삼위일체적 공동체라는 점에 대해 관심을 일깨운다. 공동 생활 자체만으로 한 공동체를 신심 깊은 여인네의 모임으로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 물론, 그 공동체는 신심 깊은 여인네의 모임이지만, 그러나 그 이상이다. 즉, 삼위일체 하느님의 삶이 그들 안에 현존하신다.
성녀가 자신을 딸, 누이, 짝으로 이해하고 알아들음은 하느님과의 개인적 만남의 결과에서 나온 표현이다. 아울러 성녀는 여성의 입장에서 삼위일체 하느님을 표현한다.
오직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적인 승인 아래서만 자매들의 삶이 삼위일체적 양상을 띤 삶으로 바뀐다. 그들은 사랑의 끈이 이어주는 일체성 안에서 성소의 은총을 통하여 딸, 누이, 짝일 수 있는데 그것은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수도 생활의 목적은 딸로서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누리는데만 있지 않고 아드님의 누이로서 그분께 사랑스레 응답하고 성령의 짝이 되어 삼위일체 하느님의 생명의 일치에 한 몫을 가짐에 있다.
성 프란치스코와 성녀 글라라는 딸, 누이, 짝 안에서 삼위일체 하느님의 삶이 얼마나 현실적인지 보여준다. 성녀는 여성적 표현과 그 영역에서 이 삶을 받아들였다. 신비 체험에서는 누구나 온전히 남자이며 또한 온전히 여자이다. 삼위일체 하느님도 같은 방법으로 당신을 보여주신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여성적 모습은 모든 그리스도인과 여성 수도자 그 중에서도 가난한 자매들이 살아야 한다. 남자와 여자 모두 삼위일체 하느님의 모상이다. 이를 가난한 자매들은 공동체 안에서 산다. 아버지처럼 베푸는 사랑의 자세로 또 아드님과도 같이 응답하는 사랑의 누이와 성령처럼 이어주는 사랑의 짝이 될 때 모든 자매는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자기 안에 사시게 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딸로서 성녀는 사랑하는 아드님을 보듯이 아버지께서 자기를 바
라보게 한다. 아버지께서 아드님에게 직접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루가 9,35) 하시듯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남자는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며 모든 여자는 하느님의 사랑하는 딸이 되어 아버지께 찬미가 된다.
마찬가지로 아드님은 아버지께로 향하게 하면서 말씀하신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믿어라”(요한 14,11). 성자의 온갖 영광은 아버지 안에서의 삶이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누이도 그분 안에 온갖 영광이 있다. 성녀는 예수 그리스도의 누이로서 그분과 함께 아버지께 ‘예’라고 응답한다. 성령께서는 아버지와 아드님 간의 일치의 봉인이다. 짝으로서 그녀는 이 일치를 피조물의 범위 내에서 산다. 이렇게 하여 신적이며 삼위일체적인 삶이 성녀 안에서 형태를 이루게 된다.
아버지께서는 베푸는 사랑으로 아드님 안에 당신을 드러내신다. 아드님께서는 사랑의 응답을 하신다. 성령께서는 이 사랑을 이어주는 ‘예’이시다.
‘딸, 누이, 짝’은 상태가 아니라 관계요 만남을 말한다. 하느님과의 만남에서 가난한 자매는 자신을 딸, 누이, 짝으로 체험한다. 신앙 생활의 목적은 하느님만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그분의 딸, 누이, 짝으로 드러내어서, 모든 이는 신적 사랑의 관계를 나누는 사람이 되고 이렇게 삼위일체로 받아들여지는데 있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궁극적 행복이다.
2. 시성 조사에서 드러나는 삼위일체
성녀 글라라는 임종이 가까웠을 때 삼위일체에 대해 자신의 영혼에게 말했다. “좋은 동행이 있으니 안심하고 가라. 너를 창조하신 분께서 너를 거룩하게 하고 너를 창조하신 후 너에게 성령을 보내시어 엄마가 아가를 사랑하듯 항상 보호하여주셨다”(시성 3, 20).
우리는 여기서 다시 삼위일체를 볼 수 있다.
- 아버지께서 창조하시고,
- 아드님께서 보호하여 주시고,
- 성령께서 거룩하게 하셨다(참조: 시성 11,3).
성녀는 자신의 영혼에게 말한다. 프라하의 성녀 아녜스에게 보낸 셋째 편지에서 설명하는 대로 성녀 글라라에게 영혼은 하느님 현존의 장소이다: “피조물 중에서 가장 높은 품위를 지닌 믿는 이의 영혼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모든 피조물보다 가장 소중하고 하늘보다 더 크다는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넓은 하늘도 모든 피조물도 그들의 창조주를 담을 수 없으나, 오직 믿는 이의 영혼만이 그분의 집이 되고 그분의 거처가 되며, 이것은 믿지 않는 이들은 지니지 못하는 오직 사랑으로써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편지 3,21-22).
그리고 성녀는 강조한다: “그대를 담으시는 분을 그대가 담는다”(편지 3,26).
회칙 6장에서 삼위일체로부터 출발하여 삼위일체에서 삶의 방향을 잡듯이 성녀 글라라는 분명 평생 동안 영혼이 삼위일체 하느님의 삶 안에 숨겨져 있었고 삼위일체를 자신의 영혼 안에서 체험하였다
성녀 글라라가 여기서 삼위일체 하느님의 작용을 통한 인간의 창조, 성화, 구원을 말하는 것으로 보아 구원의 역사(役事)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영성 분야에서 중요한 프란치스칸적 색채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실존은 그분의 역사적 구원 행위에서, 그리고 바로 지금 인간의 영혼에게 열려 있다.
마찬가지로 삶의 마지막 순간에 성녀는 자매들에게 강복하며 하느님의 연인이 되고 자기 영혼의 연인이기를 권고한다(참조: 강복 13). 성녀는 이 강복에서 하느님께서 당신 얼굴을 자매들에게로 향하기를 소망했다. 우리는 지금 삼위일체 하느님의 얼굴이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겠다.
하느님의 삼위일체적 구원 역사(役事)에서 그분을 ‘본’ 사람은 깊은 평화를 누린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과의 만남 안에서 자기 자신과도 조화를 이루는 믿는 이의 체험이다. 하느님과 인간은 경쟁하지 않고,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하시고 인간도 모든 것을 하며 바로 이렇게 인간은 하느님 안에 있다.
영혼 안에 하느님이 거처하시고, 영혼 안에서 사랑하면 그 안에 인간의 안녕을 바라시는 하느님의 모습이 드러난다.
그분은 인간을 창조하셨고(아버지),
보호하셨고(아드님),
성화하셨다(성령).
하느님의 강복을 알아듣고 받아들인 사람은, 하느님의 가치를 아는 법을 배우고 온 영혼으로 하느님께 매혹되어 자신의 깊은 곳에서 그분을 뵙는 것만이 최고의 행복이며 영광이 된다. 그러므로 자매들은 성녀가 말하는 대로 자기 영혼의 연인이 되어야 한다.
자기 영혼과의 관상적이고 사랑스런 교제는, 단순히 자신의 힘으로 자기 합리화와 자존(自尊)을 위해 자신의 깊은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자기 발견과 체험 이상의 것, 즉 자신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보고 체험한다. 이것이 영혼을 영광되게 하고 품위를 주어 스스로 숙연해지게 한다.
성녀가 자기 영혼과 이야기하는 것은, 삼위일체 하느님, 즉 자기를 창조하신 아버지와 구원한 아드님과 거룩하게 한 성령을 체험했음을 한눈에 알아보게 한다.
성녀는 임종 전 자기 영혼과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죽음으로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가 열린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성녀에게 있어 죽음은 자기를 피조물로 부양하시고(아버지) 자기를 구원하시며(아드님)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 하느님께 건너가는 것이다. 이렇게 성녀는 죽음의 순간에 살아 계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자신을 개방하는 한 신앙인이 어떻게 충만한 자기 긍정과 자유로운 자기 구속을 찾아가는지 보여준다.
3. 영성 생활 과정에서의 삼위일체
벤베누따 수녀는 시성 조사 때 글라라 성녀가 세 가지를 가르쳤다고 했다.
* 하느님을 모든 것에 앞서 사랑하고,
* 완전하게 그리고 자주 죄를 고백하며,
* 항상 주님의 수난을 기억에서 놓치지 말라(시성 11,2).
이 자매는 그 권유를 따랐고 수도 생활에 성실히 머물렀다. 그녀는 자기 개인과 공동체의 성취나 여러 상황에 좌우되지 않고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이루시는 구원의 역사적 활동에 관심 두는 것을 배웠다. 하느님께서 하셨고 또 하시는 일은 자매에게서 동떨어져 있지 않다. 우리는 하느님과 거리를 두고 살 수 없다: 그분은 거기, 나는 여기 있지만 나는 그분을 기도와 삶 가운데 끌어들인다.
더 나아가 사랑은 자기 영혼 안에서 지금 하느님과 결합되고 싶어한다. 하느님을 사랑함은 거리를 두고 갈망하는 것만이 아니고 지금 이 시간에 이루어지는 사랑의 결합이다. 피조물은 하느님 사랑으로 들어가고 이렇게 창조되었고 항상 새로이 창조되는 사실상의 피조물이 된다.
죄를 고백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더 큰 사랑을 받아들임이다. 먼저 당신 아드님의 성령 안에서 화해를 선물하시는 그 하느님과 화해가 이루어진다. 화해의 삶이란 하느님께로부터 죄 사함을 받음과 새로 태어남을 아는 것이다.
주님의 수난을 기억에서 놓치지 않음은 영혼 깊은 곳에서 그분의 사랑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기억은 사람에게 인상 깊은 지나간 사건을 상기하는 ‘장소’이다.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당하신 수난을 한두 번 상기하는데 그치지 않고 항상 기억하는 사람은 이 기억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드리는 일치의 찬미에로 들어올리시는 성령 안에 온전히 산다.
성녀 글라라의 이 권고(시성 11,2)는 영혼의 삼위일체 신비로서 자기 양성과 자기 책임의 핵심이다. 글라라에게 있어서 인간의 성숙과 발전은 현실성 있고 역사하시는 하느님 현존에 달려 있다.
새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사람, 즉 그리스도가 그 사람 안에 있게 허용한 사람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의 현존 앞에서는 구원과 해방을 느낄 만큼 누구에게나 그런 강한 힘이 있다.
무엇이 하느님으로 하여금 십자가에 못 박히시도록 하였을까? 그리스도를 십자 나무에서 고통받게(편지 4, 23) 이끈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선물한 그 사랑은 응답만을 일깨우는 것이 아니라 큰 사랑과 사랑의 모험을 일깨운다. 이 과정에서 그리스도와 글라라의 강한 개성이 분명히 드러난다.
4. 삼위일체의 전망
프라하의 아녜스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 성녀는 십자가상 예수 그리스도의
세 단계 전망, 즉 바라보고(intuere), 살펴보고(considerare), 관상함(contemplare)을 이야기한다. 어떻게 보면 같은 과정이면서도 살펴보고 관상하는 것은 바라보는 것의 심화된 모습이다(편지 2, 20).
올바르게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하는데 그것은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을 어루만지고 변화시키는 과정이다. 마침내 바라보는 이는 더 이상 자기가 아니고 보는 그 대상이 주체가 된다. 관계가 뒤바뀌는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하느님의 사랑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글라라와 함께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마음 깊이 가늠해볼 수 있다.
* 십자가에 못 박힌 분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아버지의 신적 신비를 알아보게 된다. 십자가상 그리스도의 사랑의 효력을 보면서 우리는 그 뒤에 있는 아버지의 신비를 알아채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이토록 사랑하시어 외아들을 주시기까지 하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이마다 모두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었다”(요한 3,16).
* 십자가상 사랑의 신비로 나아가자. 자세히 살펴보노라면 이 사랑이 인간을 향하여 무한정 개방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사랑이 사람과의 만남을 찾는데 어떤 이는 이 사랑을 거부하고 어떤 이는 받아들인다. 이 만남은 아드님 안에서 이루어지고, 십자가에 달려 있는 채로 그분은 살아 있는 하느님과 사람과의 만남을 이루신다.
* 우리가 이 만남을 받아들이면 관상으로 들어가 그 안에 선물된 신적 사랑의 실체로 들어가게 된다. 우리는 점점 더 이 사랑 자체에게서 ‘바라보아지며’ 어루만져지게 된다. 이 사랑은 우리 내면을 변화시킨다. 이는 성령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냥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아버지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의 신비 앞에 서 있게 되고,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이 되셨고 사랑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아드님과의 만남으로 받아들여지며, 이 사랑이 우리 내면을 성령의 활동을 통하여 변화시켜, 하느님의 사랑이 내 안에 살고 나도 그 안에 있게 된다. 우리는 이 체험을 세 단계적인 바라봄을 통하여 갖게 된다.
이렇게 세 단계로 삼위일체 하느님을 바라보면 구유로부터 시작하여 공적 활동을 거쳐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까지 사람이 되신 아드님이 사람에게 당신 삶의 공간을 주시게 된다. 이 신적 영역 안에서 사람은 그냥 살면 된다. 거기로부터 벗어나면 사람은 파멸하고, 고향 없이 떠돌고 멸망으로 치닫는다. 지옥은, 바로 삼위일체 하느님이 가까이 계시다는 안온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과 유리되어 있는 곳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를 위해 사랑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만큼 사람들과 가까이 계시고 싶어하신다. 성녀는 십자 표시로 많은 이를 치유했다. 우리는 거기서도 삼위일체를 알아볼 수 있다.
* 성녀는 ‘주님의 기도’를 기도했다: 아버지,
* 십자 표시를 했다: 아드님,
* 손으로 상처를 어루만졌다: 성령(시성 11,1).
성녀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현존 작용을 믿었다.
이 굳은 믿음이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프라하의 성녀 아녜스에게 한 축복인데, 단지 주 예수 그리스도님(아드님)께 청하기만 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축복(성령)을 주실 것이고 그렇게 이루어지리라 했다(강복 6-7).
삼위일체 하느님 이름으로 하는 강복은 사람을 고양시키고 성숙하게 한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당신 피조물이 당신의 삶에 한 몫을 누리기를 원하신다. 그분은 이를 위해 사람을 창조하셨다.
5. 신비적 체험
글라라 성녀는 삼위일체에 대해 많이 이야기했다. 자매들은 시성 조사에서 그녀의 생각들이 너무 숭고해서 알아듣기 힘들었다고 했다(시성 14,7). 성녀가 프라하의 아녜스 성녀에게 보낸 넷째 편지의 신비적 부분은 틀림없이 삼위일체적 의미에서 이해되는데, 여기서 말하는 신랑 예수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만남은 사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삶 안에서 알아듣고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성녀가 관상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유에서의 가난에서 시작하여 공생활의 겸손을 거쳐 십자가에서의 자헌적 사랑에 이르기까지의 길을 영적으로 걸어간 후에(편지 4,19-26), 그녀의 마음에서 이 세 가지 외침이 터져 나올 만큼 사랑의 불로 타올랐다.
- “오 천상의 신랑이시여, 날 이끌어 당신을 뒤따르게 해주소서. 싱그럽기 그지없는 당신의 방향으로 줄달음쳐 가리이다.”
- “당신께서 술 방으로 이 몸 데리고 가실 때까지, 나는 지치지 않고 달려 가리이다.”
- 당신께서 왼손으로 내 머리 받치시고 당신 바른 손으로 기쁘게 이 몸 안아 주시며 당신의 그 입술로 나에게 입맞춰 주실 때까지(편지 4,30-32).
이 사랑의 불꽃을 보면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이끌어줌이 있어야 한다: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로 올 수 없다”(참조: 요한 14,6).
그 후에 영혼의 술 방에서 아드님과의 친숙하고도 다정한 만남이다.
마지막으로 성령의 포옹과 입맞춤이다. 당시로서는 흔한 언어 표현인 영의 입맞춤으로 하느님 체험에 받아들여진 사람과 하느님의 깊은 결합을 보여준다.
여기서 글라라는 자신이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따라간 살아 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말하고 있다. 이 만남의 사랑 불 가운데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 현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성녀 안에 사시는 삶이 열린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영혼 안에 현존하시고 역사하신다. 사람은 자신의 영혼 안에서 이 삶에 한 몫을 누려도 좋다. 아버지는 내 영혼 안에서 언제나처럼 아드님을 사랑하시는 일을 계속하시고, 아드님은 내 영혼 안에서 아버지께 감사로운 사랑의 응답을 계속하시는데, 이 일치로 성령께서 내 안에 살아 계시고 역사하신다.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이다”(참조: 로마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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