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cac.org/inner-light-2018-03-23/
https://www.spiritualtravels.info/articles-2/north-america/kentucky-a--thomasmerton-tour/thomas-mertons-mystical-vision-in-louisvil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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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March 23, 2018
I have the immense joy of being a [human being], a member of a race in which God became incarnate. As if the sorrows and stupidities of the human condition could overwhelm me, now I realize what we all are. And if only everybody could realize this! But it cannot be explained. There is no way of telling people that they are all walking around shining like the sun.
—Thomas Merton [1]
내가 사람이라는 것, 하느님께서 몸소 그 가운데 강생하신 인류의 한 구성원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 인간 현실의 슬픔과 어리석음이 나를 압도할 수 있었듯이, 이제 나는 이렇게 우리의 본래면목을 깨닫게 된 것이다. 모든 사람이 이것을 깨달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이런 것은 말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 자신들이 마치 태양처럼 빛나며 걸어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줄 길이 없는 것이다.
— 토마스 머튼 [1]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 . . Let your light shine before others, so that they may see your good works and give glory to your Father in heaven. —Matthew 5:14, 16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16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마태오 5:14, 16
There is no way of telling people that they are all walking around shining like the sun.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마치 태양처럼 빛나며 걸어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줄 길이 없는 것이다.
—Thomas Merton토마스 머튼 [1]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The Lord let his face shine upon you and be gracious to you!
(민수기 6,25)
출처 - [지금여기 특강 이연학 신부 발제 전문]
http://m.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7565
▲토마스 머튼
성속분리의 환상
나아가 그가 ‘세상혐오(contemptus mundi)’라는, 수도승전통 뿐아니라 교회의 영성전통에서도 끈질기게 전해내려온 치명적인 영적 오해를 벗고, 비로소 ‘세상사랑(amor mundi)’이라는 더 성숙하고 복음적인 여정으로 접어들 수 있게 된 것 또한 바로 이 지점이다. 예나 오늘이나 교회 안팎을 막론하고 세상에 흔하고도 뿌리깊은 것이 성속이원론이거니와, 여기 토대를 둔 ‘정교분리론’ 역시 예나 오늘이나 그 힘이 세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실로 ‘믿을 교리’보다 더 힘세고, 어지간한 신앙보다 더 무시무시한 영향력을 대중에게 행사하는 우리 시대의 대표적 ‘상투어(cliché)’ 가운데 하나다. 머튼이 천착한 이 ‘말’의 문제에 대해서는 뒤에 따로 다루기로 한다.
“꿈에서 깨어난” 머튼은 이제 이런 것들을 한 마디로 ‘환상’이라 부르면서, 이 ‘새로운’(사실은 지극히 당연한) 깨달음의 신학적 근거도 밝히고 있다. 그것이 바로 강생의 신비이다. 그러나 강생만이 아니라 사실은 파스카 사건과 삼위일체 신비 역시 이런 관점의 토대라고 아니할 수 없다. 전적으로 타자를 위해, 타자를 향해, 타자와 함께 계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이 “타자를-위한-존재”인(D. 본회퍼) 예수그리스도의 강생을 통해 환히 드러났고, 십자가를 정점으로 하는 파스카는 강생에서 이미 시작된 그분 비움(kenosis)의 궁극적 도달점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수행의 사회적 책임
머튼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어쩌면 본인에게 가장 중요했을 수도승 수행인 ‘고독’의 가치와 ‘책임’을 새로이 발견하기에 이른다. 이는 ‘죄스러운 방관자’로서의 자각의 자연적인 귀결로서, 고독의 자리에서 ‘분리’라는 환상으로부터 깨어난 이는 다른 사람들 역시 이런 환상에서 깨어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기도와 고독은 ‘예언적 사명’의 책임을 지니게 된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그는 “필요하다면 불편한 사람, 기피대상(persona ingrata)이 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고, 세상을 떠나기 몇 시간 전 “수도승은 본질적으로 현실세계와 그 구성체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는 사람을 뜻한다”는 말도 남겼다. “그는 환상의 가면을 벗기는 일이 관상적 삶의 본질에 속한다는 사실을 이해했으니, 여러 해 동안의 기도와 고독은 그로 하여금 자기자신의 환상과 대면하게 했다. 그러나 그 과정을 통해 그는 자신과 동료 인간들에게 차라리 숨기고 싶은 현실들을 드러낼 준비를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가면 벗기기’는 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마는 게임 같은 것이 아니라 ‘두려운 의무’였다.”(헨리 나웬)
2) 사회적 실천(praxis)과 말의 문제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 vita activa>
머튼의 이러한 ‘회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요인 중 하나가 1960년에 그가 읽고 있던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부제가 ‘활동생활(vita active)’임에 유의)이었다는 사실은 그의 일기에서 잘 드러난다. 아렌트는 이 책에서, 오늘날 사회에서 시민사회(polis)의 공적 영역에 관한 관심과 헌신이 현격하게 줄어든 것은, 역사적으로 그리스도교가 ‘활동(행동, praxis)’보다 ‘관상(사색, theoria)’ 쪽에 압도적 중요성을 부여해준 탓이 크다는 점을 지적했다.
아렌트는 이 책 전체를 통해 ‘행동(사회적-정치적 실천praxis, vita activa)’이 ‘관상’에 못지 않게 얼마나 중요하고 고귀한 것인지를 설명하고 있지만, 근대 이후 ‘행동’이 착취당하는 ‘노동’으로만 소외되어버리고 만 현상, 그리하여 참으로 ‘행동’할 수 있는 인간은 극소수에 불과한 사실을 지적하면서 결국에는 그 치료법으로 다시 관상적 요소의 회복을 제시하는 듯 보인다. 머튼은 ‘관상생활(vita contemplativa)’을 소명으로 삼는 자신에게 큰 도전이 된 아렌트의 이런 분석이 오히려 “현대에 씌어진 저술 중 관상생활에 대한 가장 심오하고 중요한 옹호”라고 보았다. 그는 ‘관상’에 대한 정교하고 설득력있는 아렌트의 비판을, 활동(곧 정치)이 그 뿌리가 되는 관상(사색의 능력)과 단절되면 퇴화하여 변질되고 만다는 메시지로 알아들었던 것이다.
|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 | ||
상투어들의 치명적 힘
어떻든 아렌트의 이 책 덕분에 머튼은 현대에서 참된 관상가의 역할은 ‘활동’과 관련된 이런 역사를 이해하고 ‘속죄’하면서 시민생활의 공공성의 영역을 재발견하고 ‘사회적 혹은 정치적 실천’(praxis)의 가치를 복구하는 데에도 이바지해야 한다고 느끼게 되었던 것 같다. 그는 이런 맥락에서 특히 ‘침묵하지 않을 용기’가 중요하다고 보았는데, 그것은 위에서 말한 ‘분리’의 환상이 지속되고 확산되는 데에 ‘말’의 오염이 지대한 역할을 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말의 오염은 ‘사유의 힘’이 상실된 것과 관련이 있고, 이것은 세상을 하느님께서 보시듯 이면의 속내를 꿰뚫어보는 ‘관상의 눈’의 상실과 이어질 뿐아니라, 아이히만식의 ‘생각없음(thoughtlessness)’ 혹은 타자의 입장과 고통에 대한 상상력의 부재(공감무능력)로도 곧바로 이어진다. 그러기에 말의 오염 문제는 관상가에게 크나큰 문제가 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말의 회복은 사회적 실천(praxis)의 회복이기도 하거니와 관상(사유능력)의 회복이기도 하다. 그의 탁월한 언어감(言語感) 덕분이겠지만, 그는 이미 1960년대에 특히 정치와 언론 영역에서(그러나 교회와 수도원 안에서도!), 모든 말들이 광고카피처럼 되면서 생긴 언어의 남용-오용-악용 현상이 심각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실상 이렇게 만들어진 말들은 사람들의 정신을 지극히 효과적으로 지배계급의 의도대로 빚어나가고 ‘세뇌’시킨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다.
‘정교분리’란 어쩌면 교리보다 더 큰 위력을 발휘하는 이 시대의 막강한 상투어중 하나로서, 결국에는 불의와 폭력으로 지탱되고 있는 기득권층의 질서를 편들고 고착시키는 선택에 지나지 않는다. “교회가 정치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 “정치중립을 지켜야한다”는 말은 한국의 지배권력이 최근에도 남발해온 ‘3자개입 자제(금지)’란 말처럼, 사실상 매우 ‘정치적’ 발언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사를 보나 국내의 역사를 보나, 그것은 종교를 정치세력의 하위파트너로 기능시키려는 또 다른 형태의 ‘정교결합’(더 정확히는 ‘野合’ 혹은 ‘和姦’)인 경우가 허다했다. 그것은 결국에 가서는, 하느님을 우리 삶에 어떤 간섭도 못하시게 만든다는 점에서 ‘악마적’이기까지 하고(마르 1,24 참조), 무신론보다 더 위험한 ‘실천적 무신론’이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하고,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고 했다(하워드 진). 한때는 그 지배자의 자리에 총칼을 쥔 권력이 있었다면, 이제는 ‘돈’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무력이든 돈이든, 그들이 대중을 지배하는 가장 큰 도구가 바로 ‘말’이다. 실로, 죠지 오웰이 소설 <1984년>에서 잘 묘사한 것처럼, 대중의 말만 지배하면 그 생각도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신문을 보느냐가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그것은 우리가 매일 먹는 밥처럼 세상을 보는 우리 눈을 모르는 사이에 조정-조종하고 통제한다. 그것은 우리의 인간관, 사회관, 세계관을 모르는 사이에 처음부터 끝까지 콘트롤할 수 있고, 그리하여 역시 모르는 사이에 성경을 읽는 우리의 눈도 콘트롤할 수 있다.
말에 대한 머튼의 고민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형성되었다. 말이 이런 상황에 처해 있을 때, 그리스도인 특히 수도승에게 있어서 공적 영역에서 그리스도교적 쇄신은 무엇보다 먼저 말의 쇄신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문제의식이었다. 인종차별 문제라든지 핵문제 같은 당대의 현안에 대해 그가 침묵을 깨고 발언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런 문제의식에서였다.
| ▲영화 <신과 인간>의 한 장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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